내 마당이 있어 더 아늑한 셋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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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는 ㄱ자 모양의 왼쪽 집에서, 주인집은 ㄴ자 모양의 오른쪽 집에서 산다. 판교의 한 다가구주택은 주인과 세입자의 평등한 동거를 보장하는 실험 주택이다.
[매거진 esc] 살고 싶은 집
한옥의 특징을 적용해 한 집에서 두 가구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판교 다가구주택
임대주택 800만가구, 우리나라 두 집 중 한 집은 전월세로 산다.(국토교통부 ‘2012년 주택 자가점유율’ 통계) 모두가 아파트에서만 세들어 살 수는 없다. 집주인과 부대끼지 않고 살 수 있는 땅집은 없을까? 판교에 지어진 작은 다가구주택은 이런 고민을 담고 있다.
지난해 11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에서 집들이를 마친 하얀 2층집이 있다. 집주인 손재익(47)씨는 판교 주택지 분양 때 구입한 231㎡ 넓이의 땅을 두고 절반은 임대를 할 수 있는 다가구주택으로 지을 생각을 했다. 부부와 아이 둘이 사는데 집을 모두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임대료로 건축비를 충당해야 한다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다. 구가건축 조정구 소장이 건물 2층 왼쪽은 82.5㎡ 넓이의 세입자가 사는 집, 1층과 2층 오른쪽은 주인이 사는 132㎡ 넓이의 집으로 설계했다.
동네에는 판교 주택지 분양 때 나눠 받은 대로 비슷한 넓이의 2층집들이 들어서 있다. 젊은 건축가들의 데뷔 무대이며 중견 건축가들의 전시장과도 같은 이곳에서 손씨네 집은 유독 단순하고 소박한 모양새다. 흰색 벽에 검은 지붕, 창문은 모두 네모반듯하다. 주인이 건축가 조정구씨를 찾아간 이유는 “단순하지만 들여다보면 입체적인 재미가 있는 집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북촌 한옥을 여러채 짓고 한옥식 호텔 ‘라궁’을 설계했던 건축가는 “외관은 단순하지만 안에서는 현대식 한옥을 구현한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주인과 세입자가 사는 집에 대한 고민은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른쪽 주인집은 현관 옆 마당에 차를 세울 수 있고, 집 왼편에는 딱 차 한 대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조정구 소장은 “개별적인 주차 공간, 독자적인 출입구를 두는 의미가 있었다. 세입자 입장에서 세를 사는 느낌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당이 다르면 여기가 우리 집이라는 정체성이 생겨난다고 봤다”고 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통하지만
완전히는 만나지 않는 형태로 설계
임대까지 염두에 둬
경제성 갖춘 현대식 한옥으로 양식화
현무암으로 지어진 왼편 계단을 올라 세입자 쪽 2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앞은 부엌, 왼쪽은 마당이 보인다. 밖에선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마당이지만 2층의 중심이다. 집 전체적으로 보면 2층은 가로 3m, 세로 5m 길이의 작은 마당을 둘러싼 ㅁ자 집이다. 한쪽은 주인집으로 막혀 있기 때문에 세입자는 마당을 둘러싼 ㄷ자 집에서 사는 셈이다. 한옥을 짓고 고치면서 늘 앞집 벽으로 막힌 마당을 보아왔던 건축가는 주인집을 앞집 벽 삼아 마당을 만들었고, 집을 지은 시공사 제이아키브 대표인 김양길(40)씨는 이 마당에 반해서 아예 자신이 이 집의 첫 세입자가 됐다. “5살, 7살 두 아들이 안전한 바깥 공간에서 햇볕도 맞고 물놀이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마당에 나가 놀 때 집안 어디서나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이사 온 뒤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도 꽤나 했다. 좁긴 한데 어른 12명이 둘러앉아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밖은 찬바람이 쓸고 지나갈 때 이곳은 포근하다. 외부 시선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단란한 야외 공간인 셈이다.” 집에 살고 있는 김양길씨의 말이다. 무릇 마당은 내려가야 하는 곳이라고 여긴 건축가는 이 좁은 마당에 댓돌까지 놓아 공간감을 주었다.
외관은 단순하고 안의 구조는 복잡하다. 오른쪽 주인집 현관 입구에는 커다란 캐노피가 세워졌다.
오르락내리락, 작지만 깊은 마당을 품은 집은 평평하지 않다. 부엌 겸 대청마루는 천장까지 4.2m 높이로 작은 집의 숨통을 틔운다. 부엌 오른쪽엔 부부 침실과 화장실이, 왼쪽으론 아이들 방이 있는데 방 높이는 모두 2m를 조금 넘는다. 부엌은 높다랗고 방은 나지막한데 침실과 아이들 방의 천장은 각각 창고와 다락방으로 알뜰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낮에는 방마다 미닫이문이 활짝 열려 식구들은 구분 없이 자유롭게 방을 오간다. 밤엔 방마다 문이 닫히며 잘 준비를 시작한다.
한옥은 평면으로만 말할 수 없는 집이다. 오른쪽 주인집 거실로 들어서서 왼편 쪽마루를 딛고 올라 미닫이문을 열어젖히면 또다른 거실인 가족실이 나온다. 미닫이문을 열면 거실이 넓어지고, 문을 닫으면 가족 독서실처럼 쓸 수도 있다. 2층으로 오르면 양옆에 두개의 방이 나오는데 한쪽은 좀더 높고 한쪽은 좀더 낮다. 한쪽 방은 다락을 이고 있고 세입자 마당을 등진 다른 쪽 방은 마당보다 낮다고 했다. 세입자 마당에서 볼 때 주인집이 높고 위압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집을 한 바퀴 돌려면 한옥에서 마루를 오르고 장독대로 내려가듯 오르내려야 할 것이다. 조 소장은 “마루와 문턱, 방의 높이 등에 한옥에서 쓰는 치수를 적용했다”며 “전체적으론 집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통하지만 완전히는 만나지 않는 형태로 설계했다”고 했다.
세입자 집이 현대적이라면 주인집은 한옥을 닮은 세부 장식들이 많다
한옥처럼 숨은 공간도 많다. 주인집 부부 침실은 가족실 안쪽에 숨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는 작은 기도실이 숨어 있다. 2층 아이 방엔 방만큼이나 넓은 다락이 있다. 보통 현관의 두배 넓이는 되는 현관은 길에서 보이지 않도록 커다란 캐노피와 나무에 가려 있다. ‘담이 없는 동네’ 판교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다. 조 소장은 “이 집은 다가구주택에 한옥의 맥락이나 구성법을 적용했기 때문에 여러 유형이 한 집에 들어온 셈이다. 더구나 임대까지 염두에 두어서 경제성을 갖춘 현대식 한옥을 보편화시킬 생각으로 설계를 했다”고 말했다. 한옥 형태를 품은 다가구주택, 집주인과 세입자의 평등한 동거, 실용성 등을 실험하는 집이라는 것이다.
예전엔 한마당을 사이에 두고 주인집은 높은 대청마루를, 세입자는 쪽마루를 끼고 살았다. 판교에 지은 이 다가구주택은 주인과 세입자가 각자의 마당을 안고 산다. 주인 손재익씨는 때마침 지방 발령을 받아 지금 이 집에 살지 못한다. 두 가구 모두 세를 주고 임대료로 7억800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집을 새로 짓는 데 들어간 건축비는 4억1000만원이니 임대료로 건축비를 대고도 남았다. “아이들이 독립해서 집을 떠나면 우리 부부가 왼쪽 집으로 가서 살 수도 있고, 아이들이 두고두고 함께 산다면 왼쪽 오른쪽 사이 벽을 터서 한집으로 쓸 수도 있어요.” 사는 모양이 어떻게 달라져도 거기에 맞출 수 있는 실용적인 집을 원했다는 손재익씨의 말이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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